FarAwayL0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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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 12. 24. 03:52
작성자
래푸

다니엘 베인이 실종됐다.

 연일 매스컴이 뜨거웠다. 미합중국 양조계의 황제, ‘The Fool’의 주인, 술을 거론하는 자리마다 그의 이름이 불리며,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항상 새큼한 와인 냄새가 난다는 ‘그’ 다니엘 베인이 실종되었으니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날마다 싸구려 갱지에 조사 몇 개만 바뀐 문장이 찍혀 나왔고, 대중들은 전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뉴스를 보고도 새로운 소식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라디오 진행자들은 명사를 합법적으로 헐뜯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열한 욕망을 은근히 숨긴 점잔뺀 목소리로 대본에 없는 문장을 읽었다.

 다니엘 베인은 과연 실종되었을까요? 혹시 어린 연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거나 탈세에 대한 추적을 피해 조세회피처로 도망간 건 아닐까요? 어쩌면 그는 지금쯤 몰타에서 프로세코를 홀짝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요. 자신이 실종되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미합중국인들을 비웃으면서! 만약 베인, 당신이 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미합중국에서 아이젠하워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 미합중국이 당신 이름만을 떠들어대고 있으니—

 남자의 거친 손짓에 라디오가 꺼지고 전파를 타고 흐르는 진행자의 경박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라디오 전원 버튼에 닿아 있던 남자의 손가락은 느리게 떨어졌다. 맥박을 집어 생사를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금방이라도 굵은 손가락을 타고 흐른 피가 한 방울 떨어질 듯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더없이 깨끗했고 방 안에 시체라고는 한 구도 없었다. 단지 기계음 섞인 먹먹한 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숨 막히는 정적이 채워 죽음을 연상케 했을 뿐이다. 남자는 빠르게 걸어 방안을 가로질렀다. 벽의 끝에서 끝으로, 남자의 긴 다리는 그리 짧지 않은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방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던 구둣발은 일인용 소파 앞에 멈춰 섰다. 소파에는 선객이 앉아있었다. 구두코와 구두코가 마주했다. 아주 좁은 틈만을 남겨둔 채로. 정적과 그림자의 침입만을 허용하는 좁은 틈새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베인, 우리의 채무를 청산할 때가 온 것 같네.”

 고저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 제 몸 위에 드리운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도나토 마르케시. 모든 마르케시의 대부이자 조에 마르케시의 ‘아버지’인 남자. 다니엘 베인은 그의 콧등 위에 흉터가 없던 시절을 기억했다. 그의 얼굴은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표정만을 내비쳤다. 평상시 짓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전할 때만 나타나는 무감한 낯. 지금은 명백히 후자였다.

 싸구려 갱지 위에 찍힌 뉴스 기사는 진실을 단 한 방울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 기사들에 비견하자면 차라리 보스턴 앞바다가 홍차라는 주장이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다니엘 베인은 실종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서도 도망치지 않았고 무엇을 위해서도 떠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조금 더 기울었다. 그의 입술이 다닐의 귓불에 스칠 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왔다. 왼쪽 뺨으로 상대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이나. 다닐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가서 자네의 대녀를 찾아와.”

 무거운 목소리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도나토 마르케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니엘 베인은 몸을 일으킨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미미하게나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 베인은 실종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실종이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실종된 것처럼 꾸몄을 뿐이다.

 “어디로 갔는지 아나?”


 “몰라.”

 “누구의 소행인지는?”

 도나토는 곧장 답하는 대신 검붉은 원목 탁자 위 술병을 집어 들어 각진 유리잔에 조금 따랐다. 한참 전에 넣어둔 얼음이 녹아 잔 안에 흥건히 고여있던 물 위로 투명한 호박빛 술이 떨어져 두 액체가 뒤섞였다. 술을 잔의 반쯤 따른 도나토가 그것을 집어 들며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마르케시.”

 “…….”

 “이제 내가 자네에게 이 말을 전하는 이유를 알겠나?”

 잔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넘긴 도나토가 몸을 틀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 방은 누구의 방도 아니다. 한참 전 누군가가 시카고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를 향하며 주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방의 전 주인은 액자 속 사진의 주인이기도 했다. 턱에 스치는 짧은 단발을 고수하는, 아버지를 닮아 보이는 표정이라곤 자신만만한 미소와 무표정뿐인 여자. 다니엘 베인이 실종을 꾸민 이유이자 도나토 마르케시가 굳게 잠겨있던 주인 없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유.

 조에 마르케시. 도나토 마르케시의 양녀이자 다니엘 베인의 대녀, 사실 도나토 마르케시의 유일한 친딸인 ‘그 여자’가 실종됐다.

 다닐은 제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재킷을 거칠게 벗어 소파에 내던지듯 올려놓곤 숨을 골랐다. 서른 살이 넘은 이후로 이렇게까지나 사람의 눈을 신경 쓰며 거리를 걸은 건 처음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거대한 유리창으로 뉴욕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 들이닥쳤다. 한밤의 스포트라이트. 그 빛 속에 서 있으니, 금방이라도 셔터음이 들릴 듯 눈부셨다. 하지만 섣불리 커튼을 칠 수는 없었다. 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어야만 한다. 모두가 아무도 없다고 믿어야만 한다.

 마르케시가 마르케시의 목을 물어뜯었다. 이는 일종의 내전이요, 무력으로 후계 구도를 뒤집기 위한 쿠데타다. 그렇기에 도나토 마르케시는 조에 마르케시를 도울 수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에 승냥이들을 짓밟고 올라서 그들의 목줄을 움켜쥐기 위해서는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핏줄보다는 흘린 피가 혈통을 증명하는 세계. 적자가 되기 위해서는 손을 붉게 물들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비정한 세계에서 아비는 무엇으로 딸을 지켜야 하는가.

 오래전 다니엘 베인은 도나토 마르케시에게 목숨을 빚진 적 있다. 더럽게 축축하고 생선 썩은 내가 나던 버려진 창고에서 도나토 마르케시는 다니엘 베인을 살렸고 다니엘 베인은 도나토 마르케시에 의해 살아났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젊었다. 각자의 가족을 등에 업고도 아직은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할 때였다. 그날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농담처럼 중얼거린 말이 있다. 만약 그 애가 이 냄새를 맡아야만 한다면, 그때 자네가 그 애 곁에 있어 주면 좋겠는데……. 가족의 무게에 더불어 말의 무게도 실감하지 못하던 나날이었다.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입에 물고, 그때는, 그저 웃었는데.

 다니엘 베인은 도나토 마르케시가 수십 년 전 조에 마르케시를 지키기 위해 안배한 이다. 비록 도나토 마르케시가 다니엘 베인의 뚫린 배를 꿰맨 것은 우정에 말미암았으나 이후 그가 내뱉은 모든 말은 부정에 기인했다. 검은 눈동자는 다니엘 베인이 아닌 조에 마르케시를 위해 흔들렸고, 이제 다니엘 베인은 오래도록 간직해 온 부채를 갚아야만 했다. 수천 개의 빛이 눈 뜬 불야성의 세계. 창밖을 바라보며 다닐은 웃었다. 그는 발소리 죽인 채 책상으로 걸어가 회사 전용회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신호는 고작 두 번 울렸다. 다닐은 상대의 신원을 묻는 대신 곧장 본론을 꺼냈다.

 “가서 베인을 찾게.”

 술독에 빠져 사는 소비에트인, 그는 술독에 빠진 개들의 아버지다. 더없이 충성스럽고 더없이 날쌔며 더없이 잔인한 베인의 개들. 그들은 대부의 명령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다닐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몇 명이 죽든…….”

 다니엘 베인은 대외적으로는 어떠한 범죄 조직과도 연이 닿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그 모든 대중의 눈을 가리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그것은 그가 발 딛고 선 세계를 바꾸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제 그는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지독한 악취가 나는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곳에 서 있었다. 그의 개들은 대부의 뜻을 존중해 피 맛을 보지 않은 지 오래였다. 다닐은 잔을 찾아 술을 가득 따랐다. 수화기를 붙들지 않은 오른손에 들린 잔 속 액체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거렸다. 그는 단번에 잔을 비워내곤 말을 이었다.

 “상관없어.”

 그리고 다니엘 베인이 제 손으로 잠재웠던 개들을 깨웠다. 몇 걸음을 뒤로 물리게 되는 악수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공증도 받지 않은 계약이 두 사람에게 어떠한 무게를 가졌는지 알기에, 그는 술 한 잔과 함께 미련을 털어버렸다. 다니엘 베인은 아직 가족을 모른다. 그러나 더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단지 채무를 청산하기 위한 선택일지라도, 다니엘 베인은 제 대녀를 구하기 위해 풀독을 움직였다.

 개 떼가 미합중국 전역에 풀렸다. 언론은 그들을 포착하지 못할 것이며 설령 포착하더라도 그들과 다니엘 베인 간의 연결고리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나토 마르케시를 제외한 마르케시는 감히 그들을 의심하지 못하리라. 그 충직한 이들이 제 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을 것이라고는.

 베인은 오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조에 마르케시는 가장 먼저 피 냄새를 맡았다. 그다음으로는 생선 썩은 내를 맡았다. 고전적이군. 여자는 짧게 평가했다. 그리고 숨죽인 채 오감에 집중했다. 눈은 당연하게도 가려져 있었고, 손목은 등 뒤에 묶여있었다. 목덜미가 허전하고 살갗에 차가운 공기가 곧장 닿았다. 피부 위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조에 마르케시는 자신이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상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말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분간해 보자면 창고 안에 있는 것은 총 열 명이었다. 그중 넷은 제 등 뒤에 서 있었고, 여섯은 창고 군데군데에 퍼져 있었다. 어떻게 할지 짧게 고민한 여자는 불편하게 꺾여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자가 정신 차린 것을 눈치챈 몇몇이 그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케시.”

 명백한 조롱이 섞인 목소리였다. 여자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제 앞에 멈춰 선 이가 내뱉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직후 제 뺨을 후려치는 손바닥이 날라오기도 했거니와. 여자는 바닥에 피섞인 침을 뱉으며 소리 내 웃었다.

 “잔챙이들이 죽지도 않고 살아있을 줄 몰랐는데.”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몸과 함께 의자가 기울 정도로 세게. 여자가 바닥에 구둣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 넘어갔을 정도로 거친 몸놀림이었다. 온몸이 묶여 균형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자는 가까스로 버텨냈다.

 “왜, 바로 안 죽이고?”

 대답 대신 발소리가 돌아왔다. 창고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그에게로 다가가는 소리가 들렸다. 숨통을 조여오는 듯 가까워지는 소리에 여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잡지 보고 흔드는 걸로는 부족해?”

 “우리 아가씨가 좀 반반하신가.”

 “나 보고 세운 새끼들 한참 전에 다 짓밟아줬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 적 일이야.”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이 그의 얼굴을 희롱하듯 매만졌다. 손바닥에 뺨이 뭉개지고 손가락에 입술이 비틀렸다. 조에 마르케시는 반항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애초에 이 판에서 구르며 닳을 대로 닳은 지 오래였다. 어딘가 쑤셔져야 한다면, 글쎄, 뱃가죽보다는 다른 곳이 낫겠지.

 조에 마르케시는 열 살에 처음으로 총을 쐈고, 열네 살에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직접 죽인 사람만 수십, 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은 수백을 넘을 테다. 카지노 사업에 손을 대면서는 얼마나 많은 이를 비탄에 빠트렸던가. 그러나 남자의 손이 목을 움켜쥐는 순간 조에 마르케시가 느낀 것은 알량한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제 목을 움켜쥔 개자식의 손목을 비틀어 꺾어버리기를 바랐다. 손목이 묶였대도 그는 마르케시의 후계자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순간부터 그는 제가 몇 명이나 죽였는지 셈하기를 멈췄다. 조에 마르케시의 고고한 낯짝을 바라보던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새된 비명이 창고 안을 맴돌았다. 더럽게 아프네.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여자는 왼쪽 허벅지에 꽂힌 단검의 크기를 가늠했다. 얇고, 작다. 저를 단번에 죽일 생각은 아무래도 없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깨문 입술에서 피가 비쳤다. 혀끝에 침이 아닌 축축한 액체가 닿았다.

 “이런 게 하고 싶었어?”

 “다른 짓도 할 거니까 얌전히 기다리세요, 우리 공주님.”

 기분 나쁜 웃음이 텅 빈 창고를 메웠다. 열 명의 웃음소리였다. 허벅지를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상처에 침이 닿아 따가웠다.

 “마틴.”

 “뭐?”

 “잭, 칼, 루터, 마르코, 케빈, 폴, 이반, 벤, 존.”

 여자가 웃었다. 남자들은 더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군. 개자식. 나한테 술 얻어 마신 건 기억도 못 하나 봐?”

 “그래서?”

 “그래서? 난 그저 내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을 뿐이야.”

 여자의 손은 여전히 묶여있었고, 이제 피는 의자 다리를 타고 흘러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 썩은 생선 냄새. 한겨울 찬 공기의 서늘하게 시린 내음이 가신 이곳에서 냄새들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가린 천 안에서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쉰 목소리가 창고 안을 갈랐다.

 “새끼들이 위아래 못 알아보고 대가리를 물어뜯어?”

 “이런—”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예고 없이 무수한 총성이 쏟아졌다. 여자는 바닥을 강하게 발로 차 의자를 쓰러트렸다. 총은 그 위로 빗발쳤다. 그는 기관단총을 든 이들은 부디 무언가로 눈을 가리지 않고 있기만을 바랐다.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낯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언제나 지팡이를 들고 다녀 발소리 뒤에 딱딱한 물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끌고 다녔다.

 “고작 열 명? 이거, 레이디 조를 얕봐도 한참 얕본 인선 아닌가.”

 “밖에 더 없었습니까?”

 “한 스물 있었지.”

 “지금은요?”

 “물고기 밥 됐을 걸세. 우리 애들은 나를 안 닮아서 일 처리를 빠릿빠릿하게 하거든.”

 무언가 여자의 손을 붙잡고 그의 몸을 강하게 일으켰다. 또 다른 손은 여자의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을 조심스럽게 풀었고 여자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빛에 적응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눈을 뜬 여자가 안대 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다닐.”

 “조, 일어설 수 있겠나?”

 “네.”

 여자는 나무 의자를 집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납치당할 적에 맞은 것에 더해 몇 대 후려 맞은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아 세상이 조금 어지러운 것을 빼면 두 다리로 서 있을 만했다. 허벅지에 꽂힌 단검은 아직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과다출혈로 죽을 일은 없겠군. 짧게 혀를 찬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틴, 잭, 칼, 루터, 마르코, 케빈, 폴, 이반, 벤, 존 그리고 크리스. 유심히 보아야만 신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총알에 짓뭉개진 이들이 더러운 창고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다닐, 총 좀 빌려주십쇼.”

 “안 그래도 자네가 그걸 바랄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네.”

 다닐의 손짓에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 중 한 명이 검은 가죽 장갑 낀 다닐의 손바닥 위에 권총 한 정을 공손히 올렸다. 권총은 베인의 손을 거쳐 마르케시의 손에 도착했다. 여자는 침착하게 권총을 장전하곤 몸을 틀었다.

 “먼저 나가계시죠.”

 “몇 명 안 남겨둬도 되겠나?”

 “피떡 된 새끼 하나 제압 못 하면 저는 마르케시일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 말에 다닐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총소리와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다닐은 그들의 개를 이끌고 창고를 빠져나가 창고 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분명 변했고,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동풍이 매운 자리엔 여전히 바닷냄새가 났다. 다닐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이윽고 총소리가 멎었다.

 “다닐.”

 “일 다 봤나?”

 네. 짧게 대답한 여자는 다닐의 옆에 서 있던 개에게 다시금 권총을 넘겼다. 여자는 다리를 끌며 걸었고, 다닐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신 아직 집어넣지 않은 담뱃갑을 여자에게로 내밀었다. 조에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가까스로 붙잡아 입에 물었다. 입술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발음이 샌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혹은 입에 담배를 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죽을 뻔했는걸요.”

 다닐은 라이터를 들어 조에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조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걸어온 자리에는 피로 그려진 길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채 지워지지 않은 살인의 흔적이 선연했다. 탄피와 피 웅덩이, 매캐한 화약 냄새. 마르케시와 베인의 일상. 1950년을 지나, 1960년을 향해가는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죽였다. 살기 위해서.

 “풀독을 동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지.”

 “우리요?”

 “그래.”

 어린 마르케시는 수수께끼에 휩싸인 단어를 해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고, 베인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키울 거면 진작 나를 줬어야지. 내가 키웠으면 훨씬 잘 키웠을 거야. 조에는 입을 벌려 무어라 말하는 대신 담배 필터를 짓씹었다.

 “들은 적 있습니다.”

 “뭘?”

 “채무가 있으시다고요.”

 다닐 베인은 생각했다. 채무만큼이나 지독하게 정 없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무정한 세상에 무엇에는 정이 있겠냐마는. 그는 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에는 손에 쥐고 있던 꽁초를 입에 다시 무는 대신 바닥에 던지곤 멀쩡한 오른발로 남은 불씨를 짓밟았다.

 “전부 상환하셨습니까?”

 “자네 허벅지가 뚫려서 잘 모르겠는데.”

 “한 걸로 칩시다.”

 제 아비의 채권을 제멋대로 청산해 버리는 지극히도 오만한 발언이었다. 그 아비에 그 딸이라니까. 다닐 역시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한 대 빼 물었다.

 “한 걸로 치고,”

 여자는 이번에는 그에게서 담배를 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웠을 때쯤 여자의 곁에 다가온 정장을 입은 장정들은 그가 그들이 가지고 온 깨끗한 새 베스트와 재킷 걸쳐 입는 것을 도왔다. 다닐이 도나토에게 연락한 것은 고작해야 삼십 분 전이었다. 하여튼 저 치들도 어지간히 발이 빠르단 말이야. 그는 장정들이 건넨 담배를 입으로 받아 무는 조에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뒤이은 말에 더는 웃지 못했지만.

 “다시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닐.”

 감사 인사는 딸에게 들으라 했던가. 비록 그의 친우는 제가 내뱉은 말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이 최악의 방식으로 성립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구한 피를 무수히 흘린 죄로,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이 진창 속에 허우적거릴 뿐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언제 구원을 바랐던가? 베인은 바닥에 고인 피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들어 조에 마르케시의 얼굴을 훑었다. 다 터진 뺨에 부르튼 입술. 그러나 눈빛만은 꺾이지 않아 형형했다. 과연, 그 뒤에 선 이들 위에 능히 올라설 여자였다.

 “됐어. 가서 허벅지나 꿰매게.”

 아버지한테 목소리도 좀 들려드리고. 다닐이 덧붙인 말에 여자가 웃었다.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니야. 그러자 여자가 웃는 걸 멈췄다.
여자는 담배를 마저 피우고는 제 다리로 걸어 베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닐은 입에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오래전 빚진 목숨의 값을 오늘에서야 갚았다. 채무가 청산되었는데도 입안이 텁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무엇으로도 묶이지 않는 이름을 무엇으로 엮을 수 있을까. 다닐은 얼추 정리된 현장을 둘러보고는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사무실로 돌아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오래간만에 사무실의 불을 켰다. 그의 실종을 가장하는 동안 꺼져있던 사무실의 불이 기지개 켜듯 환하게 빛났다. 겨울밤은 아직 끝나질 않아 불을 켜자 잠시 밖이 보이질 않았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명확해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다섯 시 십 분. 안부 전화를 걸기에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느 기자가 이 시간까지도 제 사무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건지. 다닐은 입맛을 다시며 수화기를 들었다.

 “더 풀의 다니엘 베인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짧게 말을 마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다닐은 잠시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를 곱씹었다. 곧 그는 깨달았다. 전화로 전해진 말뜻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 없었다. 그는 피 묻지 않은 깨끗한 코트를 걸치고 사무실의 불을 끈 다음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을 향하여. 더는 무엇으로도 묶이지 않은 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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